
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인공지능(AI)이 산업 전반의 키워드로 급부상하면서, 가전 시장은 그야말로 'AI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TV를 켜도, 냉장고 문을 열어도, 심지어 칫솔 살균기 앞에서도 'AI'라는 단어와 마주한다. 기업들은 AI가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것처럼 광고하며 제품 마케팅 전면에 이를 내세우고 있다.
화려한 수식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다르다. 고도의 학습 알고리즘이 아닌 단순 자동화 기술이나 기본 센서 탑재, 혹은 수년 전부터 쓰이던 음성 인식 기능을 'AI'라는 포장지로 감싼 이른바 'AI 워싱(AI Washing)' 현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 "말귀 못 알아듣는데 AI?"...이름만 바꾼 단순 음성 인식
온라인 쇼핑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AI 음성 인식 서큘레이터'나 'AI 선풍기'가 대표적이다. 이들 제품은 "선풍기 켜줘", "좌우회전" 등 정해진 명령어에만 반응한다. 이는 미리 설정된 소리 패턴을 인식해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기초적인 기술일 뿐이다.
진정한 AI 음성 인식은 사용자의 문맥을 이해하고 학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좀 덥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했을 때, AI가 이를 '온도를 낮춰달라'는 의미로 파악해 풍량을 조절해야 비로소 인공지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시중의 많은 저가형 제품들은 정해진 단어가 아니면 '인식 실패'하면서도 제품명에는 버젓이 'AI'를 붙여 판매되고 있다.
■ 센서가 AI로 둔갑...모호한 설명에 소비자만 '혼란'
기술적 근거가 희박한 사례는 또 있다. 최근 인기를 끄는 'AI 온열 매트'나 'AI 칫솔 살균기'를 살펴보면, 인체의 진동이나 적외선을 감지해 전원을 끄고 켜는 기능을 AI 기술로 홍보한다. 하지만 이는 수십 년 전부터 복도 현관등에 사용되던 'PIR(Passive Infrared, 인체감지) 센서'와 다를 바 없다. 움직임이 감지되면 작동하는 단순 로직을 마치 고도화된 학습 기반 인공지능인 것처럼 포장한 셈이다.
무선청소기 시장도 마찬가지다. 'AI 기능'을 통해 바닥의 먼지를 감지하고 흡입력을 조절한다고 광고하지만, 실제 어떤 알고리즘이 적용되었는지, 제3자의 검증을 거쳤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기 어렵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존의 '오토 모드'와 무엇이 다른지 알 길 없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실정이다.
■ 대기업의 '정교함' vs 중소형의 '사각지대'
그나마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형 가전업체들은 이러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신중한 행보를 보인다.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AI 콤보'는 세탁물 무게와 오염도 감지 범위를 구체적인 수치(kg)로 적시하고 있으며, LG전자의 '디오스 AI 냉장고'는 사용 패턴을 딥러닝으로 학습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법무와 홍보 부서의 엄격한 검증을 거친 후 'AI'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소·중견 기업과 해외 직구 제품들이다. 마땅한 법적 기준이 없다 보니, 기존 알고리즘을 조금만 수정해도 AI라 지칭하며 프리미엄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AI 워싱은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의 스타트업 '빌더 AI'는 AI가 앱을 만들어준다고 홍보했으나, 실제로는 인도인 개발자 수백 명이 뒤에서 직접 코딩을 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아마존의 무인 매장 '아마존고' 역시 AI 결제 시스템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사람이 직접 영상을 보고 확인하는 수작업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가짜 AI라면 보상하라"…환불 및 보상 기준의 대전환
그동안 소비자들은 'AI'라는 용어의 모호함 때문에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마련할 'AI 표시·광고 가이드라인'은 소비자 환불 및 보상 기준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가장 큰 변화는 '단순 변심'에서 '법적 계약 위반'으로의 성격 변화다. 과거에는 AI 기능에 실망해 반품을 요구해도 기업 측이 "광고적 수사"라고 방어하면 환불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가이드라인이 정한 AI 정의(학습 및 최적화)를 충족하지 못한 제품은 표시광고법 위반에 해당한다. 이 경우 소비자는 구매 후 상당 기간이 지났더라도 계약 취소와 함께 전액 환불을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근거를 갖게 된다.
'AI 프리미엄'에 대한 차액 보상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들이 AI 가전에 기꺼이 지불했던 약 20%의 추가 가격은 일종의 '혁신 비용'이다. 만약 AI 워싱으로 판명될 경우, 소비자는 제품 전체 환불 대신 일반 모델과의 가격 차액만큼을 손해배상 형태로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또한, '작동 조건 미고지'에 대한 책임도 무거워진다. 특정 무게 이하에서만 작동하는 AI 세탁 모드처럼 핵심적인 제한 사항을 작은 글씨로 숨기거나 누락했다면 '기만적 광고'로 간주된다. 이는 소비자가 위약금 없이 즉시 반품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가 된다. 무엇보다 AI임을 증명해야 하는 '입증 책임'이 기업으로 전가되면서, 기업이 알고리즘 로그나 시험 성적서를 통해 AI 기술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면 소비자 구제 절차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분석된다.
< 공정거래위원회 AI 광고 가이드라인 주요 예상 항목 >
| 구분 | 핵심 항목 | 세부 예상 기준 및 내용 |
| 용어 정의 및 범위 | AI 기술의 명확한 정의 | 단순 센서/자동화(Rule-based)와 학습 기반 AI(Machine Learning)의 구분 기준 제시 |
| 표시의 구체성 | 기술 적용 범위 명시 | 제품 전체가 아닌 '일부 기능'에만 적용된 경우, 해당 기능과 조건(예: 특정 무게 이하 등)을 구체적으로 표기 |
| 작동 원리 설명 의무 | 사용자의 데이터를 어떻게 학습하고 결과에 반영하는지 소비자가 이해하기 쉽게 기술 | |
| 실효성 검증 | 학습 및 개선 입증 | 단방향 명령 수행이 아닌, 데이터 축적을 통한 성능 향상(Optimization) 과정 증빙 |
| 성능 수치 근거 제시 | '국내 최고', '혁신적 지능' 등 최상급 표현 사용 시 객관적 시험 결과(Test Report) 보유 필수 | |
| 검증 및 인증 | 제3자 인증 권고 | 민간 인증(AI+ 인증 등) 또는 공인기관의 기능 시험 결과서 활용을 통한 신뢰성 확보 |
| 내부 검증 절차 마련 | 법무·기술팀 등이 참여하는 자체 'AI 표시·광고 사전 심의 시스템' 구축 가이드 | |
| 부당 광고 유형 | 기만적 표시 금지 | AI가 아닌 기술(단순 음성인식 등)을 AI로 오인하게 만드는 명칭 사용 제한 |
| 비교 광고 가이드 | 타사 제품 대비 AI 성능이 우수하다고 주장할 때의 동일 조건 비교 기준 설정 |
■ "기준 마련 시급"...공정위 가이드라인 예고
전문가들은 AI 워싱이 단순한 마케팅 과장을 넘어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권을 침해한다고 경고한다. 장보은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새로운 기술 발전으로 소비자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며 "투명성 확보를 위한 거버넌스 구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이에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중 '인공지능 관련 부당 표시·광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계획이다. 소비자원과 협업해 주요 제품군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AI 기능의 실효성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를 세우겠다는 방침이다.
기술의 발전이 소비자의 편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업의 정직한 마케팅과 당국의 촘촘한 감시가 병행되어야 한다. "AI니까 무조건 좋다"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소비자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 AI 워싱 관련 소비자 구제 기준 변화 >
| 구분 | 현행 (가이드라인 전) | 변화 (가이드라인 후) |
| 환불 사유 | 주관적 불만족 (단순 변심 처리 가능성↑) | 객관적 허위 사실 (표시광고법 위반) |
| 보상 범위 | 제품 반품 위주 | AI 프리미엄 차액 환급 및 손해배상 |
| 입증 주체 | 소비자가 "이게 왜 AI가 아닌지" 증명 | 기업이 "이것이 왜 AI인지" 입증 |
| 제한 사항 | "상세페이지 참조"로 갈음 가능 | 핵심 작동 조건 미고지 시 기만적 광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