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이념갈등-
자주 듣는 정치분야 팟캐스트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저희 아버지는 아직도 코로나 백신은 효과 없고 위험한 정부의 음모'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댓글에는 ‘답이 없다’, ‘그냥 포기해라’, ‘틀딱은 바뀌지 않는다’ 같은 반응이 줄줄이 달렸다.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 ‘내 편’ 안에서 분노를 공유하는 풍경. 객관적 사실보다 내가 믿는 믿음을 더 중시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 이념 갈등의 단면이다.
■ 잘못된 확신이 사실을 이기다.
스웨덴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의 저서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등장한다. 그는 개발도상국의 교육 수준, 아동 사망률, 경제 성장률 등 데이터를 질문으로 제시하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정답을 맞혀보라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경제 전문가, 정치인, 심지어 교수들보다 침팬지가 더 많은 정답을 맞혔다.
로슬링은 말한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잘못된 확신이다.”
우리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믿음은 우리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도 사실을 압도한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에 대한 통계 지표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그러나 이념에 따라 한쪽은 이를 '성공적인 분배 정책의 증거'로, 다른 한쪽은 '소상공인 몰락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정반대의 믿음으로 해석한다. 팩트 자체가 아니라 프레임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취사선택되는 것이다.
그 믿음은 알고리즘이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유튜브, 인스타, X는 나와 다른 견해를 점점 덜 보여주고, 결국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 이른바 ‘필터버블(filter bubble)’이라고 한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클릭·좋아요·검색 기록 등을 분석해 그 사람의 관심사와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지속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념 갈등은 그렇게 기술과 감정이 결합된 확증편향의 생태계 속에서 자란다.
■ ‘진심과 오해’의 싸움
이념 갈등은 더 이상 '진보 대 보수'의 단순 구도에 머물지 않는다. 젠더, 환경, 안보, 복지 등 모든 의제가 '정치적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페미니즘'이라 하면 한쪽은 '인권'이라는 선의의 진심으로 말하고, 다른 쪽은 '과격한 이념'이라는 오해와 반감으로 말한다. 같은 단어가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민석 국무총리 간 서울 종묘를 앞세워 벌어진 갈등 사례도 진심의 과잉이 이념적 충돌로 번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 쪽은 “종묘는 국가적 자산이며 초고층 개발 계획은 세계유산 지위 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고, 한 쪽은 “세운상가 일대가 오랫동안 방치된 도시흉물이며 재개발을 통해 종묘·남산을 잇는 녹지축을 만들고 도시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양측 모두 “옳다”고 믿는 진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의 진심을 “근시안적 의견” 혹은 “개발 빙자 역사 파괴”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오 시장은 “공개토론하자”고 제안했지만, 김 총리는 “일방적 진행은 안 된다”며 서로 대화하자는 듯하면서도 상대 진영을 ‘틀린 쪽’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개발 찬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도시 미래”, “문화유산 가치”, “시민 삶의 질” 등을 자신의 진심으로 주장하면서도 상대 진심을 이념적 적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누구의 진심이 더 공공적인가’라는 프레임 싸움이 곧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원래의 도시설계·문화재 보존 논의가 감정과 정쟁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틀렸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SNS 댓글창은 토론장이 아니라 심리적 투쟁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공론장은 사라지고 남은 건 "우리와 그들"의 구도 뿐이다.
공공 갈등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각자가 옳다고 믿는 '진심'의 과잉이, 상대방의 '진심'을 '이념적 무기'나 '틀린 것'으로 규정하면서 충돌하는 것이다. '공공'의 문제인데, '감정'으로 싸우는 이유다.
■ 이념의 피로를 넘어: 생활 정치의 대두
2025년 한국사회여론조사(KSOI)에 따르면 국민의 68.2%가 “이념 논쟁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절반 이상(52.7%)은 “나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과는 대화하기 어렵다”고 했다. 즉, 피로하지만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념의 중독’ 상태다.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는 ‘이념’보다 ‘생활’을 말한다. 주거, 일자리, 기후, 교육 등 삶의 문제를 중심에 두는 ‘생활 정치’가 새 흐름이 되고 있다. 정치적 진영보다 현실적 공감이 더 큰 힘을 가지는 변화다. 이념의 해체가 아니라, 이념이 현실적 의제로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 갈등을 넘어, ‘공감의 기술’로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갈등은 사회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문제는 갈등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는 성숙함을 기르는 일이다. 이념 갈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논리의 승부’가 아니라 ‘이해의 언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정보를 보고, 다른 경험을 한다. 그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지 않을 때, 비로소 공공이 살아난다. 팩트풀니스에서 말하듯,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나쁘다.” 그리고 덜 나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조금의 여백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스마트폰 첫 화면에 뜨는 수많은 정보가 당신의 '믿음'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여백'을 남겨두는 것. 어쩌면 이념의 피로를 넘어설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공감의 기술'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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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마치며
환경, 지역, 교육, 계층, 노동, 그리고 이념. 서로 다른 이름의 분쟁이었지만, 결국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공공분쟁은 사회의 병이 아니라 사회의 맥박이다. 갈등은 멈춤이 아니라 변화의 신호다.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듣고, 이해하고, 조율하려는 노력, 그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여전히 다투고, 불편해하고, 때로는 지쳐가겠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갈등의 끝에서 우리는 결국, 공존의 언어를 배우게 될 것이다.
고은영 단국대학교 분쟁해결연구센터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