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삼성전자의 '거수기 이사회' 오명이 깨지고 있다. 최근 2조5천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결정 과정에서 나온 한 명의 '기권표'가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단순한 반대를 넘어 글로벌 투자 전문가의 시각에서 본 삼성전자의 적정 주가와 자본 배분 우선순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던져진 셈이다.
지난 1월7일 열린 삼성전자 이사회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임직원 주식 보상을 목적으로 3개월간 2조5천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이겠다는 안건이 상정됐으나, 결과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9명의 이사 중 싱가포르투자청(GIC, 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ation) 출신인 김준성 사외이사만이 '기권'을 선택했다.
김 이사는 워버그핀커스, 삼성자산운용을 거쳐 현재 싱가포르국립대(NUS,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기금의 최고투자책임자(CIO)를 맡고 있는 베테랑 투자자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삼성전자의 주주환원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는 사실은 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 "지금 자사주 살 때인가?"…CAPEX 우선론 대두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김 이사의 기권을 '자본 배분의 효율성' 측면에서 해석한다. 현재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호황기를 맞아 기술 격차를 벌리기 위한 막대한 설비투자(CAPEX, Capital Expenditures)가 절실한 시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투자 전문가인 김 이사 입장에선 재투자 수익률(ROIC, Return on Invested Capital)이 높은 설비투자에 자금을 쏟는 것이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당장의 주가 부양이나 보상보다는 미래 성장 동력 확보가 우선이라는 '투자자적 관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 "PBR 2.4배는 너무 비싸다"…매입 단가 적절성 논란
주가 수준에 대한 이견도 유력한 사유로 꼽힌다. 자사주 매입은 통상 주가가 저평가되었을 때 실행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주목할 점은 김 이사의 과거 행보다. 주가가 5만원 선까지 밀렸던 2024년 11월, 1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안건에는 찬성표를 던졌던 그다. 하지만 주가가 14만원대까지 치솟고 주가순자산비율(PBR, Price to Book Ratio)이 2.4배에 달하는 현재 시점에서는 태도를 바꿨다. 이는 현재의 삼성전자 주가가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기에는 '비싼 구간'이라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 '거수기' 탈피한 삼성 이사회, 건강한 토론의 장 되나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 이사는 지난해 1월에도 "고정적 배당은 유연성이 부족하다"며 반대 목소리를 낸 바 있고, 2024년11월에는 허은녕 사외이사가 자사주 취득 시점에 대해 기권표를 던지기도 했다.
삼성전자 측은 공식적으로 "기권 사유를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홈페이지를 통해 김 이사가 '글로벌 투자자 시각에서 소신 있게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다'고 치하한 바 있다. 이는 내부적으로도 이러한 '건강한 반대'를 이사회 다양성 제고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 주주환원과 미래 투자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
이번 기권 사태는 삼성전자가 직면한 거대한 고민을 상징한다. 주주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환원 정책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본 투입의 적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음이다.
김준성 이사가 던진 기권표는 향후 삼성전자의 주주환원 정책이 단순히 '퍼주기'식이 아닌, 철저한 밸류에이션 평가와 기회비용 산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