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한국 회계 투명성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제10대 원장 선임 과정을 둘러싼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1999년 설립 이래 원장추천위원회(원추위)의 1순위 후보가 총회에서 뒤집힌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 8일 만에 뒤집힌 운명…5:2에서 4:9로 변한 표심
회계업계에 따르면 지난 12월19일 열린 회원총회에서 곽병진 KAIST 교수가 제10대 회계기준원장으로 최종 선임됐다. 문제는 곽 교수가 원추위 단계에서는 2순위 후보였다는 점이다. 원추위는 한종수 이화여대 교수를 1순위로, 곽 교수를 2순위로 추천했으나 불과 8일 만에 열린 총회에서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특히 득표 차이가 극명하다. 원추위에서 5대 2로 한 교수를 지지했던 표심은, 총회에서 4대 9로 뒤집혔다. 한 교수는 22일 입장문을 통해 “결정적 결격 사유가 없음에도 결과가 뒤집힌 것은 공정성이 훼손된 것”이라며 “후보자 서류 유출 등 선거 관리상의 문제도 심각하다”고 성토했다.
■ ‘삼바 논란’ 앙금인가… 금감원 개입설의 실체
논란의 핵심은 금융감독원의 ‘물밑 개입’ 여부다. 금감원이 회계기준원 원장 선임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이례적이다. 업계에서는 과거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사태 당시 금감원과 대립각을 세웠던 한 교수의 이력을 원인으로 꼽는다.
총회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투표 전날 금감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는 “금감원의 감독을 받는 은행연합회, 금융투자협회, 보험협회 등을 중심으로 표심이 이동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독립적 전문가로서 의견을 낸 것이며 법원에서도 정당성이 입증됐다”며, 특정 정권이나 기업과의 유착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 독립성 훼손 우려… “투명한 설명 없으면 재발할 것”
회계업계는 이번 사태가 향후 회계기준원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민간 기구인 회계기준원이 당국의 입김에 휘둘릴 경우,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 및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제정 등 산적한 과제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회계 전문가는 “이례적인 결과에 대해 회원기관들과 당국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면, 향후 모든 선임 과정이 ‘답정너’식 거듭하기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 한국회계기준원은 민간독립기구, 비영리 재단법인
한편, 한국회계기준원(Korea Accounting Institute)은 국내 기업들이 사용하는 회계처리기준을 제정 및 해석하고,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1999년에 설립된 민간 독립 기구이다.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금융위원회로부터 회계처리기준 제정 권한을 위탁받아 수행한다.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과 일반기업회계기준 등을 관리한다. 비영리 재단법인으로서 한국공인회계사회, 대한상공회의소, 금융기관 등 다양한 회원기관의 출연으로 운영되며, 원장 선임은 원장추천위원회의 추천과 회원총회의 승인을 거쳐 최종 결정된다.
한국회계기준원은 민간 기구이지만, 법적(외감법)으로 금융위원회로부터 회계처리기준의 제정 및 해석 업무를 위탁받은 기관이다. 반면, 금융감독원은 이렇게 제정된 기준을 기업들이 제대로 준수하는지 감시하고 위반 시 제재하는 '집행 및 감독' 역할을 수행한다. 즉, 기준원이 '법(회계기준)'을 만들면 금감원이 그 법에 따라 '심판(감리)'을 보는 구조이다.
회계기준원의 운영 예산은 금감원이 징수하는 '감독분담금'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관련 법령에 따라 금감원은 징수한 분담금의 일정 비율(약 8% 이내)을 기준원의 사업비와 적립금으로 지원하며, 양 기관이 재정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양 기관은 IFRS17(새 보험회계기준) 도입이나 ESG 공시 기준 마련 등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연석회의를 통해 정책 방향을 조율한다.
하지만 최근 원장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의혹처럼, 금감원이 기준원의 독립적인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민간 기구로서의 설립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관치 논란'이 상존하는 긴장 관계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