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위기 — 성장 피로와 제도적 포위망 속의 핀테크
핀테크 산업은 지난 10여 년간 금융혁신의 최전선에서 전통 금융권을 위협하며 빠르게 성장해왔다. 초기에는 사용자 중심의 UX 혁신과 민첩한 기술도입, 과감한 서비스 설계로 기존 금융사를 압도했지만, 지금 그 기세는 뚜렷하게 꺾였다. 투자자본의 유입은 둔화되었고, 소비자 신뢰는 약화되었으며, 규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위기를 단순한 경기침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보다 정확히는 산업 구조와 제도 구조의 충돌에서 비롯된 구조적 위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규제 포위망과 산업구조의 부조화
핀테크 산업 위기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규제의 다층적 포위망이다. 핀테크는 금융과 ICT의 경계에 서 있으나, 현행 규제체계는 이 경계를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다. 전통 금융업 중심으로 구축된 규제는 새로운 기술기반 서비스에 기존 금융규제를 중첩 적용하고 있다.
가상자산 사업자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전자금융거래법, 자금세탁방지(AML) 규정을 동시에 적용받고, 마이데이터 사업자는 신용정보법, 개인정보보호법, 전자금융법의 삼중 규제를 받는다. 이러한 다층적 규제는 대기업에게는 감당 가능한 부담일 수 있으나, 자본력이 취약한 스타트업에게는 막대한 법무·준법·감사 비용을 요구하며 사실상 혁신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비용이 단순한 초기 진입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업모델을 수정하거나 확장할 때마다 규제 해석을 새롭게 받아야 하고, 그때마다 수개월에서 수년의 지연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기술력과 아이디어가 충분한 기업조차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규제샌드박스 역시 실효성이 낮다. 이는 규제를 일시 유예할 뿐, 규제 해석의 근본적 유연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결국 많은 핀테크 기업들이 규제 해석과 리스크 관리라는 비생산적 비용의 늪에 빠져 있으며, 기술혁신은 지연되고 있다. 혁신 역량이 있는 기업조차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소비자 신뢰 결핍과 자본 이탈
핀테크의 생명력은 이용자 기반 확보에 달려 있지만, 소비자 신뢰는 여전히 취약하다. 보이스피싱, 개인정보 유출, P2P 대출 부실 등의 사건이 반복되며 핀테크는 ‘편리하지만 위험한 서비스’라는 낙인을 얻었다. 소비자는 이제 편리함보다 안전성을 우선시하며, 이는 이용자 확보 → 데이터 축적 → 서비스 고도화 → 수익화라는 성장 사슬을 붕괴시킨다.
이 신뢰 결핍은 투자자본의 이탈로 이어졌다. 초기 핀테크 기업들은 대체로 B2C 중심의 수수료 기반 모델을 택했지만, 전통 금융사의 추격과 규제 비용 증가는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반면 전통 금융사는 인프라와 고객기반을 갖춘 상태에서 디지털 전환(DX)을 통해 핀테크 기능을 흡수하며 반격하고 있다. 벤처캐피털은 핀테크에서 생명과학·AI·클린테크로 투자 대상을 옮기며 핀테크의 투자 환경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자본이 이탈하면 혁신 인력도 따라 빠져나간다. 업계에서는 ‘아이디어는 많지만 실행력이 없다’는 자조가 들려온다. 이는 신뢰가 확보되지 않은 시장에서 혁신의 동력이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규제완화 기대의 한계
업계는 오래전부터 규제완화를 요구했지만, 금융산업의 속성상 규제는 공공성과 소비자보호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움직이며, 급격한 완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근 금융당국은 오히려 ‘혁신보다 안정’을 기조로 삼고 있어 단기간 내 규제환경이 바뀔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규제완화만을 기다리는 전략은 실질적 출구가 될 수 없다. 규제를 전제로 한 혁신 역량을 키우는 전략이 요구된다.
위기의 본질 — 제도와 산업의 정합성 부재
지금의 위기는 기술 기반 산업구조가 전통 금융 규제구조와 정합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핀테크는 민첩성과 확장성을 무기로 성장했지만, 금융규제는 신뢰와 안정성을 중심 가치로 삼는다. 이 가치 충돌은 핀테크를 혁신가가 아닌 잠재적 위험원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 불일치를 해결하지 못하면 핀테크 산업은 제도권 금융의 하청 구조에 흡수되거나 주변적 기능만 담당하는 ‘반(半)혁신 산업’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기술적 전환과 전략적 재편 — AI 중심 패러다임 구축 로드맵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규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내재화하고 흡수해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AI는 규제 적응과 산업 재구성의 핵심 기술로 부상한다. 단순한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산업의 규제 적응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전략적 전환이 요구된다.
규제를 흡수하는 기술로서의 AI
AI는 방대한 데이터 처리와 패턴 인식 능력을 통해 규제 준수 프로세스를 자동화할 수 있다.
AML/CFT 자동화: 그래프 신경망 기반 이상거래 탐지로 복잡한 자금흐름의 숨겨진 네트워크를 실시간 탐색한다.
규제보고 자동화: 회계·거래 데이터를 표준화해 감독당국에 실시간 보고함으로써 오류와 지연을 제거한다.
개인정보·GDPR 대응: 데이터 비식별화, 민감정보 자동분류, 접근통제 자동화를 통해 법규 준수 비용을 줄인다.
이러한 AI 기반 RegTech·SupTech 체계는 규제를 비용이 아닌 진입장벽이자 경쟁력의 원천으로 전환시킨다.
소비자 신뢰 회복과 시장 확장
AI는 초개인화 금융상품 추천, 설명가능한 로보어드바이저(XAI-RA), 대화형 챗봇 상담 등을 통해 소비자 보호와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다. 고객 거래·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춤형 상품을 추천하고, 투자 결정 과정을 시각화해 설명하며, 24시간 상담으로 불안과 오해를 감소시킨다. 이는 ‘위험한 서비스’라는 인식을 ‘보호적 금융’으로 전환하며, 신뢰-이용자-데이터-고도화의 선순환을 만든다.
데이터-모델-서비스 통합 생태계 구축
AI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데이터-모델-서비스 삼위일체 구조가 필요하다.
1. 데이터 계층: 정형·비정형 금융데이터 통합 및 품질·정합성 확보
2. 모델 계층: AML탐지·위험평가·추천·예측 모델 모듈화 및 연합학습 기반 개인정보보호
3. 서비스 계층: API 기반 외부 파트너 연동 및 오픈뱅킹·마이데이터 등과 결합
이 구조는 기능 단위 서비스를 지능적 플랫폼 생태계로 전환시켜 수익성과 확장성을 확보하게 한다.
AI 전환은 책임소재·편향·투명성 등 새로운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설명가능성(XAI), 편향 검증, 책임추적성 기준을 제정하고, AI 오류에 대한 법적 책임주체를 명확히 하며, 업계·정부·학계·소비자단체가 참여하는 AI-핀테크 공공위원회를 설립해 검증·인증·위험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신뢰 없이는 어떤 혁신도 금융에 정착할 수 없다.
국가정책과 민간 인력생태계의 조화
AI 중심 전환은 개별 기업의 선택을 넘어 국가 전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책적인 대응이 관계 당국의 몫이라면, AI 핀테크 전문 인력 양성은 민간 차원의 역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때 교육 시장의 참여와 활발한 움직임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 각 대학교에 신설되고 있는 인공지능융합학과의 확산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산업과 학계가 협력해 AI와 금융을 융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길러내야 한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AI 샌드박스 제도화와 규제혁신 펀드 조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재 양성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대학과 기업, 교육기관이 되어야 하며, 현장의 수요와 연결된 실천적 교육과정이 뒷받침될 때만이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맺음말 — 생존이 아닌 재정의
핀테크의 위기는 산업의 정체성과 위상을 재정의하는 문제다. AI는 규제를 무력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규제를 흡수하고 신뢰를 재구축하며 산업을 재설계하는 기술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AI 없는 핀테크를 폐기하고 AI 중심 핀테크로 산업을 재정렬하는 결단이다. 핀테크는 더 이상 ‘혁신의 변방’이 아니라 ‘규제와 혁신의 중심’을 지향해야 하며, AI는 그 전환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동력이다.
핀테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