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말부터 시작되어 2020년 초부터 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2021년 초 겨울에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유효한 대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정부나 국민들이나 모두가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들을 쏟아내면서, 불안과 분노는 때로는 정부의 형태와 체제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혼미 속에서 세계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역시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 대유행이 발생시키고 있는 체재에 대한 의혹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혹은 사회주의 체제가 코로나를 다루는데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가 ?
3일 현재 전 세계 코로나 감염 확진자는 85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사망자도 184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이 세계 1위로 확진자는 2000만 명을 돌파했고 사망자도 35만 명을 넘기면서 확진자수는 민주주의의 상징 미국이 전 세계의 25%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바이러스(혹은 우한 바이러스)라며, 중국 때문에 전 세계가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해온 중국은 지난해 봄 이후 신규 증가가 억제되어 발표 누계로 미국의 200분의 1에 머무르고 있다. 중국의 통계가 과연 정확한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뒤로 한다.
패권을 다투고 있는 두 강대국, 세계의 민주주의를 대표격을 자처해 온 미국이 위신을 잃고, 권위주의를 보다 더 강화하고 있는 시진핑의 중국이 감염 확산을 억누르고 있다. 통계를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실제 바이러스 자체를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는 별개의 논의 대상이다.
신종 코로나는 아직도 수수께끼가 많다. 비교하기는 쉽지 않지만 체제 우위를 둘러싼 논란이 일부에서 일어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체제가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권위주의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질문은 코로나19 발생 이전부터 있어왔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 인도. 호주 등은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신흥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중국식 통치방법에 가까워지는 움직임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웨덴의 국제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의 자유와 정치 참여 등의 기준에 비춰볼 때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2019년에는 18년 만에 민주주의 국가수가 비민주주의 국가 수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고 있고, 나아가 상당수 국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높은 위험의 상황에 빠져 있다. 바이러스 대유행 이전에는 민주주의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조치들이 거침없이 시행되고 있다. 민주주의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 영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세계화에 수반하는 격차의 확대나 중산층의 흔들림, 이민이나 난민 문제 등을 배경으로 다양한 가치관을 서로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본연의 자세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일부 지도자들은 문제의 근원을 드러내 근원적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방식으로 인기를 끌어 보려는 가장 분열적인 포퓰리즘을 이용해왔다.
코로나19는 온정적 얼굴이 있는 민주정치를 냉혈적인 정치로 변질시켰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선ㅁ거의 승자가 사회 전체를 끌어 올릴 책무를 망각했던 문제가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코로나로 민주주의의 민낯이 일부 드러났다. 그렇다면 권위주의, 사회주의는 효과적인 체제인가 ? 역시 큰 모순에 직면해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중국이다. 도시를 무지막지하게 전면 봉쇄하고 살고 있는 집 대문, 현관문을 밖에서 대못을 쳐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일들이 벌어졌다. 권위주의의 적나라한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권위주의는 이 같이 강권정책, 일방정책은 잘 하지만, 정보를 공유해 시민들의 자율적 행동을 촉진시키는 지역 사정에 맞는 대응책을 펼치는 시책에서는 권위주의가 민주상회에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질적인 중국 공산당의 정보 은폐 체질이나 얼마나 많은 전염 피해를 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공산당이 언론 자유를 봉쇄하는 것은 그들 체제의 위태로움을 덮는 데 혈안이 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유럽, 남미, 옛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후안 린쯔(Juan J. Linz)라는 정치학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정당 없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고, “민주적인 여러 제도는 지지자들에게 만족되는 정책을 낳는 범위 내에서 존중 된다”고 말했다. 지금으로 치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사람들이 미래에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책이 필요한 것이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은 승리 선언에서 고(故) 존 루이스 의원의 말을 인용, “민주주의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카멀라 해리스는 말을 이었다. “바로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의지만큼, 딱 그만큼만 강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리스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희생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적 주장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인 이른바 트럼피즘(Trumpism) 끝에 미국이 얻은 교훈은 세계에 무거운 의미를 던져줬다. 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보고 자랑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즉 거만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걸음걸음을 바로 잡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에는 다양성의 힘이 존재한다. 코로나19로 완전 폐쇄된 도시 중국 우한(Wuhan)의 작가이자 중국 ‘신사실주의 대표작가’로 불리는 팡팡(方方)은 “국가의 문명도(文明度)를 재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시사적 논고를 했다. 높은 빌딩이 있느냐도, 강력한 무기나 하이테크가 있느냐도 아니다. 유일한 잣대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이라고 강조했다.
국가 사회 전체 질서를 존중하는 권위주의에 대해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갖는 강점은 바로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점’에 있다.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무도 그 고시를 방치하지 않는 의연한 결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에 불안을 안고 사는 저소득층,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분야와 물류를 담당하는 사람들, 육아에 고민하는 부모들, 병이나 장애와 함께 사는 환우들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함께 어려운 문제들에 임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코로나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불평등은 사람들의 능력을 낭비시킨다. 저소득층으로 밀려나거나, 저소득층이 무소득층으로 바뀌는 등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불평등이 심화되면 될수록 일자리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능력이 사장되고 만다. 국가가 이러한 약자들의 능력을 끌어내야 하며, 그 능력들을 모아 국가 경쟁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냉전시절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다양성이 안전한 세상을 만든다”고 했다. 또 그는 “우리가 지금 당장에 의견의 차이를 해소시킬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이 다양성을 느끼도록 노력할 수는 잇을 것이다”고 말했다. 의견의 차이를 해소시키려면 대화와 설득을 해야 한다. 설득은 어렵고 쉬운 것은 선전선동일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사회는 설득보다는 선전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 사회에는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해도, 민주주의는 설득을, 다양성 존중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