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중국의 반도체 공세를 막아야 한다는 말은 이제 안일한 소리다. 메모리를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이미 역전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반도체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이 서 있다. 그동안 정부와 업계가 ‘메모리 초격차’라는 달콤한 수식어에 취해 있는 사이, 중국은 미국의 강력한 수출 규제를 오히려 ‘자립의 기회’로 삼아 소재·부품·장비(소부장)부터 후공정, 파운드리까지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반도체산업협회(SIA, 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의 최신 지표는 이 충격적인 진단을 수치로 증명한다. 지난해 기준 소재 분야 점유율에서 중국은 20%를 기록하며 한국(15%)을 앞질렀다. 반도체 위탁생산인 파운드리 역시 중국이 27%로 한국(16%)과 두 자릿수 격차를 벌렸다. 한 수 아래로 봤던 반도체 장비(중국 5%, 한국 1%)와 후공정·패키징(중국 28%, 한국 9%) 분야에서도 한국은 중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처지가 됐다.
■ 미국 규제가 키운 괴물 ‘나우라’, 삼성·TSMC 안방까지 침투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으로 떠오른 기업은 장비업체 ‘나우라테크놀로지(NAURA)’이다. 이 회사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2023년 약 4조6000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6조2000억원을 돌파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순이익 역시 1조원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보조금만 먹는 하마’라는 오명을 벗어던졌다.
나우라의 급성장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규제가 있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와 중국 대표 낸드플래시 메모리 제조사 YMTC(Yangtze Memory Technologies Co., Ltd.)가 미국산 장비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필사적으로 나우라의 식각기(Etching)와 증착 장비(CVD, Chemical Vapor Deposition)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중국 내 28나노 공정 라인의 국산화율은 무려 70% 수준까지 올라왔다.
더욱 뼈아픈 대목은 나우라가 자국 내수 시장을 넘어 해외 시장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나우라는 이미 TSMC 난징 공장은 물론, 삼성전자의 시안 공장으로부터도 장비 수주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안방인 삼성전자 공장에 중국산 장비가 당당히 입성하고 있는 것이다.
■ ‘적자의 늪’ 탈출한 CXMT, 범용 D램 시장의 메기 되나
메모리 분야라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그동안 중국 메모리 기업들은 낮은 수율과 기술력 부족으로 영업이익률 마이너스(-) 50~60%를 기록하며 ‘돈 쏟아붓는 밑 빠진 독’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최근 범용 D램 가격의 상승세가 이들에게 구원투수가 됐다.
D램 가격이 오르면서 중국 최대 메모리 업체인 창신메모리(CXMT, ChangXin Memory Technologies)가 드디어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탄을 확보한 CXMT는 무서운 속도로 점유율을 확장 중이다. 지난해 CXMT의 D램 시장 점유율은 6%로 전년 대비 2배 급증했다. 이는 고스란히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중국 내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마이크론의 중국향 D램 매출은 전년 대비 약 30%나 폭락했다.
■ HBM 잔치에 숟가락 얹는 중국, ‘화웨이-CXMT’ 동맹의 위협
현재 한국 반도체의 유일한 희망인 고대역폭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 시장에도 중국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미국의 블랙리스트인 화웨이는 현재 한국과 미국의 HBM을 조달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에 화웨이는 CXMT에 HBM 공급을 강력하게 독촉하고 있다.
CXMT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HBM3 시제품을 화웨이 등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양산을 시작해 내년에는 최신 공정인 HBM3E 기술력까지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비록 초기 수율이 50% 안팎에 그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지만, 중국 특유의 ‘물량 공세’와 ‘학습 속도’를 고려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 반도체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메모리라는 마지막 보루마저 중국의 ‘국가 단위 밸류체인’ 공격에 흔들리고 있다. 기업의 개별 대응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소부장 육성과 생태계 보호 전략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골든타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