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지난 3월 미국 워싱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옆에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등 실전 근육을 가진 테크 거물들이 앉았다. 대통령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 President’s Council of Advisors on Science and Technology) 위원으로서 국가의 미래 전략을 직접 설계하기 위해서다.
반면, 비슷한 시기 출범한 한국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 명단에서 산업계 인사의 비중은 고작 10%에 불과했다. 박근혜 정부 이후 역대 최저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헌법 제127조에 근거해 설치된 대통령 직속 최상위 기구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과 예산 배분을 결정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한다.
1991년 상설 기구로 발족한 이후 2004년 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으면서 위상이 대폭 강화됐다. 2018년에는 정책 자문 기능과 예산 심의 기능을 통합하여, 현재는 연간 수십조 원에 달하는 국가 R&D 예산의 배분과 주요 과학기술 전략을 심의·의결하는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 과학기술 정책의 설계도와 실행 계획을 확정하는 국가 과학기술계의 최고 권위 기구라 할 수 있다.
■ 10년 넘게 멈춘 시계…‘교수 중심’의 견고한 성벽
지난 12년간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구성을 전수 분석한 결과, 자문 테이블의 주도권은 단 한 번도 대학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고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뉴딜’, ‘AI 국가전략’ 등 구호는 화려하게 변했지만, 자문위원의 50~60%는 늘 교수진의 몫이었다.
박근혜 정부 1기 당시 분과의장 세 자리는 모두 대학 총장이나 학술원장이 차지했고, 문재인 정부 시절 AI 예산이 역대 최대로 편성됐을 때도 실제 AI 비즈니스를 운영해 본 현장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대기업 현직 임원이 합류하며 산업계 비중이 25%까지 오르기도 했으나, 최근 이재명 정부 1기에서는 다시 10%로 급감했다.
문제는 이 구조가 가져오는 ‘언어의 단절’이다. 연구자의 언어인 ‘논문과 피인용 지수’가 자문 테이블을 지배하는 동안, 시장의 언어인 ‘공급망 지배력과 제품화 성공률’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결과적으로 정책은 시장의 수요가 아닌 공급자(대학·연구소) 중심으로 설계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 세계 2위 투자에도 ‘혁신 꼴찌’…설계가 잘못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4.93%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하지만 성적표는 초라하다. 특허 중 외국인 공동발명자 비율은 OECD 최하위(2.4%)이며, 기업 연구비의 97.7%는 대학이나 연구소로 흐르지 않고 자체 집행된다. 산·학·연 협력이 완전히 실종된 ‘고립된 혁신’이다.
이러한 ‘단절’의 뿌리에는 자문회의의 구조적 결함이 자리 잡고 있다. 국가 R&D 예산의 70% 이상이 대학과 출연연으로 흐르는데, 그 예산의 방향을 정하는 자문위원 대다수가 예산의 수혜자인 교수들이다. 고위험·고수익 연구보다 안전한 논문용 연구에 자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다.
■ 미국·일본·중국의 파격…“누가 설계하느냐가 승패 결정”
주요국들은 이미 ‘자문’의 개념을 ‘설계’로 바꾸고 있다.
미국 트럼프 2기 PCAST는 위원 13명 중 12명을 테크 기업 CEO로 채웠다. 산업계 비중 92%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정책의 속도를 현장 속도에 맞췄다. 일본 종합과학기술·이노베이션회의(CSTI, Council for 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는 학계와 산업계를 4:4 비율로 철저히 맞춘다. 특히 위원 임기를 3년으로 보장하고 국회 동의를 거치게 해 정책의 전문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잡았다. 중국은 당 직속 중앙과학기술위원회(CSTC, Central Science and Technology Commission)를 통해 군사와 민간, 기초와 응용 기술을 하나의 테이블에 통합했다.
반면 한국은 민간위원 임기가 1년에 불과하다. 정책 맥락을 파악하다 임기가 끝나는 구조다. 행정 언어에 익숙하고 관료들과 네트워크가 깊은 ‘검증된 교수’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 ‘예산 삭감’ 사태가 증명한 자문의 실질성 부재
지난해 발생한 R&D 예산 16.6% 삭감 사태는 자문 기구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에 33년 만의 예산 삭감이 결정되는 동안, 자문기구는 과학적 근거나 시장의 논리로 이를 완충하지 못했다. ‘나눠먹기’라는 비판에 맞설 실질적인 데이터와 시장 언어를 가진 인사가 테이블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재량’이 아닌 ‘제도’로 승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문위원 중 기업인 비중을 법적으로 최소 40% 이상 확보해야 하고, 현행 1년인 임기를 최소 2~3년으로 늘리고, 일본처럼 국회 동의 절차를 도입해 위원의 책임감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권고했고 행정부가 이를 수용했는지 추적·공개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과학기술 전쟁 시대, 자문은 의견을 듣는 요식 행위가 아니다.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전략을 짜는 ‘설계’ 과정이다. 설계자의 언어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과학기술의 ‘패스트 팔로워’ 탈출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상아탑의 울타리를 넘어 거친 시장의 숨소리를 정책 테이블 중앙으로 끌어들여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