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원료 물질과 폐질환, 천식 등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법원 판단에 대해 전문가들이 반박했다. 논란이 된 ‘동물 실험’ 결과에 대해선 “대안적으로 활용될 뿐, 유해성 여부는 인체 영향이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개별 인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기 중에 원료 성분이 극미량 검출된 것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독성영향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는 19일 오전 참여연대에서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임직원들 1심 무죄 선고 관련 가습기 살균제 전문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1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옥시 등의 가습기 살균제 원료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과 이 사건의 클로로메틸아소티아졸리논(CMIT), 메틸아소티아졸리논(MIT)는 구조와 성분이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재판 과정에서 직접 증언을 한 전문가들이 법원 판결에 대한 검토 의견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은 과학자의 판단 방식과 법원의 재판 판결 기준은 다를 수 있다면서도 재판부 판결에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동물 실험은 ‘옵션’, 문제점 발견되지 않는 경우 많아”
12일 가습기살균제 관련 판결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됐던 부분은 재판부가 동물 실험 결과로 유해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국립환경과학원의 2018년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규명을 위한 독성시험’에서 동물 실험 결과 권장사용량의 833배로 설정해 4주간 하루 20시간, 주 7회 빈도로 CMIT·MIT 성분에 실험 쥐를 노출시킨 실험에서 폐섬유화 악화가 관찰되지 않았는데, 법원은 이를 주목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몸이 증거“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물 실험은 ‘옵션’이며, 동물 실험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반박했다.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기저귀 살충제 등도 동물 실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기형을 발견하지 못해 실패한 사례는 넘쳐난다”며, “동물 실험을 전세계적으로 중단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재판부가) 개별 인과는 평가하지 않고 개인적 요인이라고 치부했다”면서 “11명 중 7명이 아이들인데 화학물질과 직업 노출이 없었던 아이들의 폐 손상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환경보건학회 부회장인 김성균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동물실험은 인체에 실험할 수 없는 상황에 대안적으로 활용된다”며,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 중 CMIT·MIT 함유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가 있다. 국제암연구소의 1급 발암물질 인정여부는 충분한 증거가 인체에서 나오면 지정된다. 이처럼 물질의 유해성 여부는 인체 영향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백도명 서울보건대학원 교수도 “동물 실험이 사람의 영향을 나타내는 반증이 되지 못한다”면서 “대신 다른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단독 사용자들에게 폐 손상이 나타나고, 폐 기능을 검사해보면 폐포 공기 교환 능력이 저하된 결과가 보인다. 옥시 제품과 똑같이 사람한테서 폐 손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보다 노출된 정도가 중요하다”
재판부가 2011년 노출재연실험에서 공기 중에 CMIT·MIT성분이 극미량 검출돼 가습기살균제 흡입과 폐질환, 천식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 전문가들은 “극히 낮은 수준에서도 독성영향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현 환경보건안전연구소장은 “흡입독성시험처럼 하루 6시간만 노출되고 이후 18시간은 중단되는 조건에서는 질환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낮았지만, 낮은 수준의 노출 조건에서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면서 “20시간씩 4주간 노출 시켰던 시험의 경우 예상과 달리 2주 만에 기존엔 전혀 확인되지 않았던 사망하는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어 “천식의 경우도 직업적 노출에 의해 보고된 바 있기 때문에, 유발 가능성은 이미 확인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재판부가 전문가의 증언이 단정적이지 않고 지적한 판결문 일부에 대해선 “과학자들은 통상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안전성평가연구소 이규홍 박사는 “현재 가설은 그것이 깨질 때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며, 항상 그 가설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2심 재판부는 과학자로 구성된 자문 패널을 구성하라”
법조 전문가인 박태현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엄격한 증명을 다른 형사재판과 같이 요구함으로써 과학 연구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드러내 무죄를 판결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며, “인체 실험을 하지 않는 한 완전한 증거가 나올 수 없다”고 전했다.
2심 재판부에는 “피고인들이 산출한 위험 가능성을 엄격하게 확증할 수 없다는 이 사건의 특성을 고려해 증명 정도를 낮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과학자로 구성된 자문 패널을 구성하고, 종합적인 의견에 기초해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검찰은 18일 해당 사건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에 항소장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