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김천에 내려와 생활하면서 농촌의 현실을 전보다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논과 밭이 이어지고, 그곳에서 만나는 농민들의 이야기는 법이 정한 기준과는 조금 다르다.
평생 농사를 짓던 부모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논밭을 일구기 어렵다. 도시에 사는 자녀가 직접 농사를 이어받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수십 년 지켜온 땅을 쉽게 팔기도 어렵다. 결국 이웃 농민에게 맡기거나 임대한다. 법의 기준으로 보면 소유자와 경작자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농촌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고령화와 인구 감소, 영농 승계 단절이 만들어낸 현실이기도 하다.
김천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농촌의 변화를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년 사이 인구가 3천명 넘게 줄었다. 농촌의 변화는 통계 속 숫자가 아니라 매일 마주치는 현실이다.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농지 전수조사에 나섰다. 실제 농업에 이용하지 않으면서 투기 목적으로 보유하거나 불법으로 전용하는 행위를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전수조사는 필요한 측면이 있다. 농지는 일반 부동산과 다르다.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기반이고 식량안보와 직결되는 한정된 자원이다. 개발이익만 기다리는 투기까지 농촌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식이다.
■ 284만 필지가 보여준 제도와 현실의 간극
정부의 기본조사 결과 전체 조사 대상의 27%인 약 284만 필지가 농지법 위반 의심 대상으로 분류됐다. 불법 임대차 의심 21.1%, 무단 휴경 11.6%, 불법 전용 9%, 소유 제한 위반 1.4% 등이다. 다만 아직 위반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이 숫자를 단순히 적발 대상의 규모로만 볼 것인가. 오히려 왜 이렇게 많은 농지가 현행 제도의 기준과 맞지 않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수백만 필지가 법의 경계에 놓여 있다면 준법의식만 탓하기 전에 제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농지제도의 기본 틀이 만들어진 이후 농촌은 크게 달라졌다. 인구는 줄고 고령화는 빨라졌으며, 도시에서 생활하는 자녀가 농지를 상속받는 일도 흔해졌다. 법이 바뀌는 속도보다 농촌이 변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 경자유전의 원칙도 현실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헌법과 농지법이 지향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농지가 소수 지주의 투기 대상이 되거나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실제 농업에 이용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 원칙을 가볍게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칙과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거 농촌에는 지주와 소작농의 문제가 컸다면, 지금은 농사를 지을 사람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 더 큰 문제인 지역이 많다.
김천의 농촌도 예외가 아니다. 읍·면 지역에 들어가 보면 고령화는 숫자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농지를 가진 사람과 앞으로 그 땅에서 계속 농사지을 사람이 반드시 같을 수 없는 현실을 제도도 직시해야 한다. 80대 농민이 건강 때문에 논을 맡기는 것과 개발이익을 노려 농지를 사들이는 투기적 행위, 도시 자녀가 물려받은 농지를 지역 농민에게 임대하는 경우와 허위 영농계획으로 취득한 투기는 결코 같은 문제가 아니다.
행정의 역량은 규정을 동일하게 적용하는 데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현실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제시하는 데 있다.
■ 단속이 오히려 농지를 놀리게 해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이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다.
불법 임대차 단속을 피하기 위해 소유자가 기존 임대를 중단하고 직접 경작하는 형식만 갖추려 한다면, 농사를 잘 짓던 임차농은 농지를 잃고 소유자는 형식적인 경작에 나설 수도 있다. 형식을 맞추려다 그 땅을 제대로 이용하던 사람을 밀어낸다면 정책의 목적과 결과가 뒤바뀌는 셈이다.
단속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면 거래 자체도 위축될 수 있다. 농사를 그만두려는 고령 농민은 농지를 넘기기 어렵고, 규모를 늘리려는 농업인은 필요한 농지를 확보하지 못한다. 실제로 이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고령으로 농지를 임차 준 농민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땅을 빼앗아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번졌고, 농지 가격을 낮춰도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왔다. 정부여당이 보완책 마련에 나선 것도 이런 현장의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책의 취지와 실제 나타날 결과는 별개로 봐야 한다. 농사를 잘 짓는 임차농에게 안정적으로 농지를 공급하고, 직접 경작하기 어려운 소유자는 합법적으로 농지를 맡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오히려 농업 생산이라는 정책 목적에 더 가깝다.
■ 2조2617억원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정부는 농지은행의 매입·임대 기능을 확대하고 청년농과 실제 경작자에게 농지를 공급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7년 농식품부 예산안에는 공공임대용 농지매입과 선임대후매도 등에 2조2617억원이 편성됐다. 올해 1조8077억원보다 4540억원 늘어난 규모이며, 공급 면적도 5230ha에서 6800ha로 확대된다.
취지는 타당하다. 그러나 정책은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농지를 매입했는지가 아니라, 그 농지가 실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에게 돌아갔는지, 청년농이 안정적으로 정착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민간에서 합법적으로 임대·이용될 수 있는 농지를 제도가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채, 세금을 들여 공공이 사들이고 임대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식인지 검토해야 한다.
공공 매입이 필요한 농지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정부가 사서 해결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농지정책의 목적은 생산 기반을 지키는 데 있지만, 그 과정에서 농민과 상속인이 느끼는 재산 가치의 불확실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책에 대한 신뢰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의 예측 가능성에서 만들어진다.
■ 농지정책은 ‘소유’에서 ‘이용’으로 가야 한다
이번 전수조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은 단속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조사를 통해 드러난 현실을 토대로 농지제도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첫째, 투기와 불가피한 임대차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허위 영농계획이나 개발이익을 노린 장기 방치는 엄정하게 대응하되, 고령·질병·상속·이농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직접 경작이 어려운 경우에는 공식적인 임대와 위탁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농지은행을 단순한 매입기관이 아니라 유통과 이용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강화해야 한다. 정부가 직접 사들이는 것보다 민간의 농지가 제대로 이용되게 하는 것이 먼저다.
셋째, 상속농지 제도를 현실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 비농업 자녀의 상속을 예외로만 다루기보다 실제 농업인에게 안정적으로 임대하거나 이전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혀야 한다.
넷째, 지역에 따라 정책의 기준과 강도도 달라져야 한다. 투기 위험이 큰 수도권과 경작할 사람이 부족한 산간 농촌을 같은 기준으로 관리하는 것이 경자유전의 목적을 가장 잘 실현하는 방법인지 검토할 때가 됐다.
■ 전수조사의 진짜 성과는 제도를 고치는 것이다
공직에서 여러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확인한 것이 있다. 제도는 처음 만들었을 때의 목적만으로 영원히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회가 바뀌면 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이번 전수조사의 가장 큰 성과가 284만 필지의 위반 의심 농지를 찾아낸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숫자는 농촌은 변했는데 농지제도가 그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농지 투기는 막아야 하고 경자유전의 정신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농지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반드시 소유자를 규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농지가 실제 농업에 이용되고 있는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안정적으로 농지를 확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농촌이 지속 가능한가이다.
정부가 이번 전수조사를 단속으로 끝낸다면 많은 처분명령과 갈등만 남을 수 있다. 반대로 소유와 이용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투기는 차단하면서도 임대와 위탁은 현실에 맞게 제도화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84만 필지는 단속해야 할 숫자이기 전에 제도를 다시 살펴보라는 신호다. 그 숫자가 묻는 것은 간단하다. 농민이 잘못인가, 제도가 낡았는가.
김천에 내려와 농촌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더 분명해진 것이 있다. 농지를 지킨다는 것은 땅의 소유관계를 지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땅에서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누군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농지를 지키는 정책의 최종 목적은 규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농업이어야 한다.

조상명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 前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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