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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6 (일)

지움으로 완성한 30년 추상…이태량의 역설적 회화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서 56번째 개인전 ‘가볍게 처절하게’ 개최
500호 대작 포함 최근작 20여 점 출품…지움과 중첩의 미학 조명
목탄의 휘발성과 유화의 영속성 충돌…캔버스 밖 관객 감정과 소통

 

경제타임스 전영진 기자 |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AI)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적 전환기 속에서, 30년 넘게 한국 추상표현주의를 지켜온 이태량 작가가 물리적 붓질과 회화 본질을 되묻는 대규모 기획전을 마련했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리는 이태량 작가의 56번째 개인전 ‘가볍게 처절하게(Lightly and Desperately)’는 작가가 걸어온 사유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500호 규모의 대작을 비롯해 20호에서 200호에 이르는 최근작 20여 점이 대거 출품됐다. 지난해 개최된 화업 30주년 회고전 이후 새로 제작된 작업들로, 작가의 심화된 미학적 기조를 다각도에서 확인하는 자리다.

 

 

재료의 충돌과 생성·소멸의 레이어

 

이태량의 작업 방식은 그리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의 연속적인 중첩에 기반한다. 작가는 화면 위에 검은 목탄으로 거침없이 선을 그어 내린 뒤, 그 위를 유화물감으로 두껍게 덮는다. 이어 물감이 굳어가는 표면에 다시 스크래치를 내며 밑색과 선을 지워내는 물리적 노동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선택한 목탄과 유화물감은 극단적인 재료적 대비를 이룬다. 손끝의 적은 마찰에도 쉽게 번지고 사라지는 목탄의 휘발성은 순식간에 휘휘 내젓는 즉흥적 기운을 담아낸다. 반면 캔버스 위에 두껍게 안착해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유화의 영속성은 고착된 수렴의 상태를 뜻한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매체는 한 화면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며 특유의 질감과 깊이감을 형성한다.

 

화면 위에서 정교하게 완성된 형태나 도상적 메시지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처음 그었던 선은 물감 아래로 사라지지만 완벽히 안멸하지 않으며, 지워진 자리 위에 다시 그어진 선과 긁힌 자국들이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붓질의 즉흥적인 가벼움 뒤에는 수없이 덮고 가른 작가의 집요한 시간과 노동이 수반된다. 전시명인 ‘가볍게 처절하게’는 이러한 시각적 정서와 작업 과정의 역설적 조화를 명확히 가리킨다.

 

 

1995년 첫 개인전부터 이어진 사유의 궤적

 

이러한 고유의 제작 기법은 1995년 첫 개인전 이후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미학적 탐구와 맥을 같이한다. 작가는 그간 '존재와 사고', '명제형식', '무경산수' 시리즈를 거쳐 2023년부터 '헤르메틱'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작을 발표해 왔다. 작업의 명칭과 형식적 변화는 계속되었으나, 화면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도출한 답을 다시 의심하며 지워나가는 태도는 한결같이 유지되어 왔다.

 

화업 30년을 넘긴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는 역설적인 화두를 제시한다. 캔버스 내부에 특정 이념이나 거창한 미학적 철학을 심어두고 관객에게 이를 해석할 것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화면 안의 정답을 거두어냄으로써 캔버스 밖의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삶에서 유래한 감정을 자유롭게 투영하도록 유도하는 작업 체계다.

 

 

■ “정작 중요한 것은 캔버스 밖 관객의 삶과 감정”

 

전시 현장에서 만난 이태량 작가는 “그림 안에 거창한 가치나 논리를 주입하는 순간 오히려 회화 본연의 순수성과 생명력이 퇴색할 수 있다”며 “작가가 부여한 정형화된 의미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캔버스 밖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희망, 사랑, 고통, 한계 같은 고유한 감정의 파동”이라고 강조했다.

 

미술계 전문가들 역시 작가의 지움의 행위에 주목한다. 갤러리그림손 관계자는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품어내는 작가의 자유로운 추상 행위는 디지털 미디어와 생성형 AI가 범람하는 현시대에도 인간의 물리적 붓질과 회화 고유의 매체성이 인간 삶의 중심에서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태량 작가의 56번째 개인전 ‘가볍게 처절하게’는 9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에 위치한 갤러리그림손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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