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일해도 굶는다"…벼랑끝 임금체불 2조원 시대

  • 등록 2025.12.29 09: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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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현장 일용직 ‘생계 파산’ 위기…역대 최다 기록
17개월 건설업 불황 직격탄… 퇴직금 체불이 ‘폭탄’

 

 

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일 안 하면 굶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일해도 굶어요." 경기도 남부의 한 건설 현장에서 만난 형틀 목수 안 모(49) 씨의 말에는 뼈아픈 역설이 담겨 있다. 공정 지연과 원청의 대금 지급 지연이 겹치며 안 씨의 퇴직금과 밀린 임금은 이번 달에도 '0원'이다. 월세는 밀리고 공구값 등 선비용만 나가는 일용직의 삶은 파산 직전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 '블랙리스트' 무서워 입 닫는 노동자들…통계 밖 체불은 더 심각

 

정부는 임금 체불을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했지만, 현장의 체감 온도는 더욱 차갑다. 서울 강북 재개발 현장의 전기공 정 모(45) 씨는 일당을 세 번이나 떼이고도 노동청 신고를 포기했다. 업계에 '검은 딱지(블랙리스트)'가 찍히면 다음 현장에서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하는 '침묵의 체불'까지 고려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가늠조차 어렵다. 건설업 불황이 깊어지면서 하도급·일용직·외국인 노동자 등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에 있는 취약계층이 불황의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 역대 최악의 성적표…8월에 이미 1.5조 육박

 

고용노동부 통계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수치로 증명한다. 지난해 임금 체불액은 2조 448억 원으로 사상 처음 2조 원 시대를 열었다. 올해 상황은 더 나쁘다. 지난 8월 기준 체불액은 1조 4,885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6%나 급증했다. 연말이면 피해 근로자 수가 28만 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다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건설업의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윗선에서 돈줄이 막히면 그 여파가 맨 아래 근로자에게 전가되는 만성적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목돈이 드는 퇴직금을 차일피일 미루는 관행도 체불 규모를 키우는 고질병으로 꼽힌다.

 

■ "체불은 범죄" 인식 전환과 제도적 우선순위 확립 시급

 

정부는 최근 체불 사업주에 대한 법정형을 상향(3년→5년 이하 징역)하고 상습 체불 사업장 공개를 확대하는 등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이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김남석 변호사(법무법인 위민)는 "악의적 체불에 대해 훨씬 강력한 실형 선고가 이뤄져야 사업주들이 경각심을 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임금 최우선 변제 원칙'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양승엽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해외처럼 임금이 은행 채무보다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임금이 '나중에 줘도 되는 돈'이 아닌 '가장 먼저 줘야 할 돈'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한, 건설 현장의 "일해도 굶는다"는 절규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은국 기자 ket@k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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